한문문학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창작되었으나 통일신라와 발해가 양립한 남북국시대에 들어서 본격 발달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신라는 문치에 힘을 기울여 많은 학자와 문인을 양성했으며, 적지 않은 유학생을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여 활발하게 문학을 교류 했다. 발해의 자료는 많지 않으나, 당과 일본에서 그 문학적 수준을 높이 평가한 사실로 보아 한문문학이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국학의 설치, 입당 유학생 증가로 인하여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국학과 독서삼품과 설치, 견당
유학생의 증가 등에 따라 성덕왕과 경덕왕 때에는 한문학이 융성했다. 국학의 설치에서 독서삼품과의 시행에 이르는 개혁과정에서 두 드러지게 부각된 세력이 다름아닌 골품제도 아래에서 신분차별을 받아온 육두품을 비롯한 하급귀족이었다. 강수, 설총 등 육두품 출신은 국학 설치를 주도했으며, 통일신라의 외교문서를 담당한 제문, 수진, 골번 등은 모두 진골이 아닌 하급귀족 이하 출신이었다. 이들 하급귀족 출신 문인들은 풍부한 경학 과 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8세기를 한문학의 전성기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시는 7~9세기에 신라 • 발해 •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공통 양식으로 널리 수용, 정착되기에 이른다. 개인의 서정을 본격적으로 노래한 한시 작품은 삼국이 통일된 7세기 말엽 이후에 성행한 것 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자료로 볼 때, 「왕오천축국전이 삽입된 혜초의 작품, 김지장이 당나라 구화산에 머물 때 쓴 작품 등에 이르러 한시가 종교적 • 정치적 • 외교적인 공적 기능에서 벗어나 한 인간의 서정을 노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준 한시 작품이 많지 않은 가운데, 우선 8세기 이후 중국, 일본 등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한시를 남긴 발해 시인들이 주목된 다. 발해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남북국시대의 한시문학은 국제적 영향관계를 파악하는 데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다. 양태사, 왕효겸, 석인정 등의 발해 시인들은 일본 시인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이들의 작품이 일본의 대표적 한시집에 실려 전한다. 특히 이 시기에 한시는 정치적 교화와 의례의 차원을 넘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들의 의사소통을 담당함으로써 서정성을 더욱 강화해갔다. 이 가운데 양태사가 지은 「밤에 다듬이소리를 듣다」는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향을 그리워하며 읊은 것으로, 24행의 7언배율이다.
귀국할 날을 앞둔 시적 화자는 고향생각으로 잠 못 이루며, 향수는 애틋하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 어디선가 들리는 다듬이 소리가 심회를 북돋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구체적인 정감을 띠고 다가온다. 이같은 시적 안목과 구성을 통해 발해인들의 한시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양태사는 출중한 문학적 재능으로 국외에서까지 이름을 떨친 인물로, 동아시아문화권의 국제인다운 시적 감각과 표현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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