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초기에는 지배체제의 확립과 효율적 운영을 위해 문자가 필요했다. 주로 국가의 공식 역사서, 외교문서, 각종 금석문, 국내 정치 문서 등이 문자로 기록되었다. 특히 산문은 주로 서정적 내면을 표현하는 시 혹은 시가와 달리, 국가체제의 확립이나 외교문서의 작성 등, 공공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에 부합하며 이념성을 구현하는 방향에서 주로 창작되었다. 이에 비해 시양식은 일찍부터 창작되었고, 가악무와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의와 유희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가 점차 개인의 서정을 표현하는 쪽으로 변화해왔다. 산문창작은 대부분 정치, 외교적 필요성, 국가 위업의 선양과 체제정비 요구에 부응했으니, 역사서 편찬과 기념비 건립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함께 대중국 외교문서 작성과 국왕의 율령 반포 같은 국가의 공식행사와 제도 정비를 중심으로 그 사용 범위가 확대되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자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삼국시대 한시 작품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 정법사의 '영고석',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의 '태평송'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은 4언고시의 소박한 형태에서 벗어나 한층 복잡한 5언고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외로운 바위를 노래하다'는 고구려 승려 정법사가 6세기 후반 무렵에 창작한 5언 8구의 고시 작품이다. 호숫가 외로운 바위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시인은 주관적 감정을 가능한한 배제하고 객관적 경물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뚝 솟은 바위의 자태를 그림으로써 높고 넓고 강인한 이미지로 표현하고, 그 외로운 바위에 자신의 심격을 의탁하고 있다. 이것은 수도자의 고고한 정신세계의 우의로, 바위는 시인 혹은 시인이 열망하는 이상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한시를 대표하는 또다른 작품으로 '여수장우중문시'가 있다. 이 한시는 5언 4구의 고시로, 612년 을지문덕이 고구려에 쳐들어 온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형식의 작품이다. 반어적 표현을 통해 적장의 허세를 비웃고 있으며, 화려한 표현보다는 내용의 질실함에 비중을 두었다. 이런 점은 활동성과 실질, 그리고 무를 함께 숭상하는 고구려의 문풍과 연결된다.
한편 이 시기 산문 창작과 관련해 먼저 언급할 작품으로는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등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자료이다. 관련기록을 통해 이들 서적의 개략적 내용과 편찬의식 등을 추정할 수 있는바, 구비전승되던 신화, 전설, 왕실의 계보 등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듯하다. 그후 고구려에서는 '유기' 100권을 토대로 영양왕 때 신집 5권을 새로 편찬하였다. 이는 정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현실문제에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그 이전의 신화적, 설화적 성격과 구별되는 현실적, 실용적 성격을 강조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역사서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이후 산문사 전개의 초석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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