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는 자기중심적인 문화를 일궈가던 고대사회를 벗어나 중세보편주의로 진입하던 시기였다. 이때를 보편주의시대라 부르는 이유는 공동의 문자와 사상으로 동아시아 중세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문명권의 중심에는 당시 세계제국이던 당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한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최치원도 12세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선진문물을 흠뻑 섭취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서 나말여초문학사의 동향을 가늠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문화가 중국과 서로 섞여 같게 된 것은 기쁘게 여기고자 하나, 필설은 중국과 차이가 있어 부끄럽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문체는 비록 충적을 짝하게 되었지만 토성은 조음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문자는 겨우 결승을 면했으나 말은 기어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모두 번역에 의지해야 비로소 통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당나라에 주달하고 사실을 맞아들임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중국에서 배운 사람의 통역에 의지해야 바야흐로 동이의 정을 통할 수 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 그곳에 머물던 숙위학생들을 돌려보내라고 청하는 글 '주청숙위학생환번장'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문체가 충적과 짝하게 되고 문자가 결승을 면했다'는 것은 신라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해 사용하던 이두식 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설총이 완성한 그 표기법을 소중하게 여겨 높이 평가하지만, 최치원은 그렇지 않았다. 말과 문자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에 겪을 수 밖에 없는 동아시아 문명교류의 장벽을 지적한 것이다. 역시 중국유학을 했던 고려초의 최행귀도 설총의 그런 작업을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양송의 뛰어난 글이 동쪽으로 오는 배편에 자주 전해오지만, 신라의 훌륭한 글은 서쪽으로 가는 사신 편에 전해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같은 막힘은 통단할 만한 일이다. 이 어찌 공자가 이 땅에 살고자 하였으나 끝내 동방에 이르지 못한 이유가 아닐 것이며, 설총이 억지로 한문을 바꾸어 번거롭게 쥐꼬리 같은 일을 만든 소치가 아니겠는가?"
최행귀의 태도는 최치원보다 훨씬 단호했다. 중국과 우리의 언어장벽이 된 이두식 표기야말로 신라는 물론 고려가 동아시아문명권으로 진입하는 데에 장애가 되었다고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공자 같은 성인이 우리나라에 오지 못한 까닭을, 이두식 표기로 말미암은 언어장벽 때문이라 강변할 정도였다. 최치원과 최행귀의 이런 언어관은 중국이라는 세계제국을 자주 접했던 나말여초 지식인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전환은 우리 고유의 향찰식 표기를 폐기하는 대신 한문을 동아시아 보편문어로 채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향찰식 표기의 폐기를 주장했던 이들을 사대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우리가 고대국가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중세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육두품 지식인인 이들이 주도한 나말여초문학사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 단계로 도약할 수 있었다. 나말여초 서사문학을 동아시아 서사문학의 전통 위에서 조망해야 할 필요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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