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에서 조선까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전승되던 단군신화는 조선이 서구 열강의 침입과 일본 제국주의의 위협에 놓이자 강력한 민족통합 담론으로 떠오른다. 이미 1895년부터 일본의 시라또리 쿠라끼찌, 나까 미찌요 같은 학자들은 단군신화를 일연이 만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평가절하했지만, 그럴수록 단군신화는 고조선의 건국신화를 넘어 한반도와 요동지역 여러 종족의 기원에 놓인 위대한 민족통합의 신화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의 고양에는 단군신앙운동이나 근대적 민족계몽운동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민족의 위기를 우리 고유의 정신에서 찾자는 운동이 19세기말에 시작되었는데 평안도와 백두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단군신앙운동 역시 그 일환이었다. 이 운동의 흐름 속에서 '환단고기'나 '규원사회'처럼 찬란한 단군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비서들이 '발견'되고, 1909년에는 나철을 중심으로 단군을 교조로 숭배하는 대종교가 창시되게이 이른다. 오래전에 존재했던 한 고대국가의 건국신화가 근대 민족종교로 재탄생한 것이다. 대종교가 그 후 중광단이나 대한군정부의 이름으로 한일운동에 중심에 서고, 포교활동의 일환으로 '신단실기', '산단민사' 등을 출판했던 것을 보면, 단군신화가 민족신화로 격상하고 단군이 민족을 하나로 묶는 종교적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단군신화가 민족신화로 성립되는 데에는 근대적 계몽운동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895년부터 근대적 학교교육의 일환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학부의 역사교과서는 민족사의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배치함으로써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추인한다. 1905년을 기적으로 역사교과서의 단군 이미지가 합리적으로 변모하지만 민족의 시조라는 지위에는 변함이 없었다. 학부의 역사인식을 비판한 신채호는 단군-기자로 연결되는 계보가 아니라 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되는 단군 계보를 주장했지만, 기자로 이어지는 부여로 계승되든 민족사의 첫머리에 시조 단군이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다를바 없다. 이런 교과서의 계몽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 등의 신문이 단기를 사용하고, 단군의 후손이라는 기사를 통해 단군민족주의를 확산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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