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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건국신화의 재인식

by 정보공유장인 2023. 1. 14.

 고려 이전 제주도를 포함한 한반도와 그 북부지역에 있던 여러 고대국가의 신화 가운데 고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끈 것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건국신화였다. 고구려 주몽의 신화가 주목받은 까닭은, 이규보가 '동명왕편' 서문에서 밝혔듯이, 우부애부도 아는 흥미로운 이야기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에 고구려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계몽기에 단재 신채호가 신라 중심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면서 부여, 고구려 계통의 역사를 '조선상고사'의 중심으로 삼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모은 신화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였다. 이는 고조선이 고구려보다 앞선 나라, 한반도와 그 북부지역에 설립되었던 나라들의 기원에 해당하는 나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고조선 멸망 후 단군신화는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화는 그 이야기와 거기에 얽힌 의례를 신성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어야 신화일 수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해체와 더불어 단군신화도 해체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구동성으로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고조선은 역사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 역사와 단군의 신화는 이들 유민의 기억에 남아 구전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을 모시는 제단이 있다고 기록돼 있고, '세종실록'에는 황해도 구월산에 삼성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적혀 있으며, 나아가 19세기 '무당내력' 같은 자료에도 단군이 기록되는 것을 보면, 무당들에 의해 의례와 신화는 부단히 지켜지고 지속되었던 듯하다. '삼국유사'가 '옛 기록'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문헌에도 남아 전해졌을 것이다. 고조선은 사라졌지만 단군신화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군신화는 단지 '살아남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조선 멸망 이후 전승과정에서 조금씩 변형을 거치면서 지속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삼국사기'에는 없지만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놓인 것이 고조선의 역사, 곧 단군신화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으로 이어지는, 삼한을 비롯한 여러 소국들 앞에 단군신화를 수원지처럼 배치해놓고 있다. '삼국유사'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도 그러한 것으로 보아, 단군을 삼한 공동의 시조로 여기는 것은 13세기 다수 고려인들의 공통감각이었던 것 같다.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삼한일통 의식이라고 한다. 이런 의식은 일반적으로 삼국통일 이후 형성되었다고 보지만, 이것이 13세기에 이르러 특히 역사서술의 형태로 부각된 이유는 몽골제국이라는 외세의 위협과 무관치 않다. 이 시기에 이런 의식을 공유한 이들에게 단군신화는 이미 고조선만의 신화가 아니었다. 고조선이라는 일개 고대국가를 넘어선 '민족'의 신화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민족'이란 근대적 의미의 민족은 아니다. 삼국통일 이후 중국이나 북방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공통의 잡단의식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준민족'이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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