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행귀3 나말여초 문학사의 새 지평 나말여초는 자기중심적인 문화를 일궈가던 고대사회를 벗어나 중세보편주의로 진입하던 시기였다. 이때를 보편주의시대라 부르는 이유는 공동의 문자와 사상으로 동아시아 중세문명을 꽃피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문명권의 중심에는 당시 세계제국이던 당나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한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최치원도 12세 어린 나이에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선진문물을 흠뻑 섭취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계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음과 같은 그의 발언에서 나말여초문학사의 동향을 가늠할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문화가 중국과 서로 섞여 같게 된 것은 기쁘게 여기고자 하나, 필설은 중국과 차이가 있어 부끄럽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문체는 비록 충적을 짝하게 되었지만 토성은 조음과 구별.. 2023. 1. 24. 향가의 내용과 작품세계 향가는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민족어 시가로서 당대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우리 민족의 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향가 가운데 가장 세련된 형식과 서정세계를 보여준 사뇌가가 문헌상으로 이미 유리왕대부터 확인되는 터이다. 그렇지만 향가가 본격적으로 한단계 신장, 상승할 수 있었던 까닭은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유입이 계기였을 개연성이 크다. 대승불교를 접함으로써 비로소 당대 지식인들은 타인의 고통과 사회모순에 눈뜨고 사회적 실천에 나서게 되었고, 그러한 실천과정 속에서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고 성숙함으로써 새로운 노래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행귀가 향가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마사, 문칙, 체원이라는 승려가 '허공 속에 전아한 노래를 새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던 것도 .. 2023. 1. 19. 향가의 주요 담당층 향가의 담당층은 승려 또는 화랑도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귀족층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향가를 풍류도와의 사상적 연관 속에서 보려는 시각이 나타나면서, 향가의 담당층이 화랑이나 낭도가 중심이고, 승려라 해도 화랑에 소속된 낭도승이 중심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향가라는 민족시가를 이른바 풍류라는 민족 고유의 사상과 연관지어 이해하려는 노력은 원칙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풍류가 오래 지속되어 신라인에게는 습속 차원으로 수용되었으며, 민족의 생활 속에서 체질화되어 녹아들었다고 볼 때, 당대의 산물인 향가 역시 이와 관련짓지 않고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향가를 풍류사상과 연관지어 이해하려는 입장과, 화랑이라는 특수한 제도의 형성, 발달, 쇠퇴의.. 2023. 1. 18. 이전 1 다음